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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훼방죄 안식

즉시 2022. 1. 27. 20:08

성경의 순서, 바울 서신의 순서는 절묘하기 그지없습니다.
믿음의 나그네 여정의 출발인 구원의 원리가 로마서에 있고, 그 종착점인 안식의 원리가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안식에 어떻게 들어가는것일까요?

또 그분께서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들이 자신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느냐, 오직 믿지 아니한 자들이 아니냐? (히3:1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에 더 큰 이를 두고 맹세할 수 없으므로 자신을 두고 맹세하여 (히6:13)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히6:14)
그가 이같이 끈기 있게 견딘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얻었느니라. (히6:15)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약속을 붙잡고, 끝까지 믿어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약속을 붙잡아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야 할까요?

이것에 대하여는 [성령님]께서도 우리에게 증인이 되시나니 그분께서 앞서 이르시기를, (히10:15)
그 날들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하신 뒤에 (히10:16)
또, 내가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0:17)

그러므로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심을 보건대 그분은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느니라. (히7:25)

회개 후 영접하여 성령님이 내안에 오시고, 이후 인내로 불변하는 약속들을 끝까지 믿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안식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마음에 걸리는 구절들이 있을겁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히6:4)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히6:5)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히6:6)

그럼 어떻게 떨어져 나가는지 살펴봐야 할텐데, 이 앞구절들을 보겠습니다.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들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나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 (히5:12)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니라. (히5:13)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에게 속하나니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느니라. (히5:14)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가서 죽은 행위들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히6:1)
침례들에 관한 교리와 안수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의 기초를 다시 놓지 말지니라. (히6:2)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히6:3)

우리는 영적 성장에 따라 알맞은 음식을 먹어야합니다. 처음엔 첫째 기초 원리인 젖을 먹고 어느정도 성장 후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즉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떠나 다음 단계로 때에 맞게 조금씩 완전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젖을 먹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이것을 하다가 교리의 기초를 자기 마음대로 다시 놓아버리면 떨어져 나갈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또 그의 모든 서신에서도 이것들에 관해 그 안에서 말하였으되 그 안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므로 배우지 못하여 불안정한 자들이 다른 성경 기록들과 같이 그것들도 왜곡하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느니라. (벧후3:16)

신약 서신들에서 경고하는 수많은 거짓 대언자들이 교만으로 이 길을 가버렸습니다.
떨어져 나가는 것에 대한 또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 (히10:26)
대적들을 삼킬 심판과 불 같은 격노에 대하여 두렵게 기다리는 어떤 일만 남아 있느니라. (히10:27)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 (히10:28)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되는 형벌은 얼마나 더 극심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해 보라. (히10:29)

예수님을 발로 밟고, 보혈을 하찮게 여기며, 성령께 무례히 행한답니다. 성령훼방죄로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럼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을 대적하는 신성모독죄를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갖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은 사람들이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신성모독하는 것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하고 (마12:31)
또 누구든지 말로 사람의 [아들]을 대적하면 그는 용서받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님]을 대적하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그는 용서받지 못하리라. (마12:32)

이 구절 앞쪽에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이 나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를 그분께 데려오매 그분께서 그를 고쳐 주시니 눈멀고 말 못하는 자가 말도 하고 보게 되니라. (마12:22)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이르되, 이분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시냐? 하나 (마12:23)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듣고 이르되, 이자가 마귀들의 통치자 바알세붑을 힘입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내쫓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12:2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왕국마다 황폐하게 되며 스스로 분쟁하는 도시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마12:25)
사탄이 만일 사탄을 내쫓으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왕국이 서겠느냐? (마12:26)
또 내가 바알세붑을 힘입어 마귀들을 내쫓으면 너희 아이들은 누구를 힘입어 그들을 내쫓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마12:27)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단순히 예수님을 마귀들렸다해서라기엔 이면은 더 복잡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마귀들의 통치자를 거론한 것은 12장 전에 9장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갈 때에, 보라, 그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자를 그분께 데려오매 (마9:32)
그 마귀가 내쫓기고 말 못하는 자가 말을 하거늘 무리들이 놀라며 이르되, 이스라엘에서 결코 그 일을 이런 식으로 본 적이 없다, 하나 (마9:33)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마귀들의 통치자를 통해 마귀들을 내쫓는다, 하더라. (마9:34)

둘 다 말 못하고, 12장은 심지어 눈도 멀었습니다. 33절을 주목해보세요. 이런 식이 아닐뿐 마귀 쫓는 일은 있었습니다. 위 12장 27절에 바리새인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바리새인퇴마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리들이 놀란 '이런 식'이란 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사역 초창기 마태복음 4장부터 이미 마귀들을 쫓아내 왔는데, 왜 이 일은 이렇게 놀라는 걸까요?
제가 예수님이 마귀 쫓는 구절들을 찾아봤는데, 전부 예수님은 꾸짖으며 나가라 정도의 말씀으로 마귀들을 쫓습니다. 그러면 '이런 식'이 예수님의 방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부터는 추측인데 바로 저 두 구절의 공통점 퇴마대상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퇴마 관련 티비프로를 보면 퇴마사가 퇴마 과정에 악령과 대화를 하는 부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퇴마사들도 이와 유사해 말 못하는 귀신을 퇴마하는 일이 이스라엘에 이전엔 없어서 무리들이 놀란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합니다. 이건 확실한게 아니니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이 사건이 도대체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길래, 유사한 사건이 마태복음에서만 두번이 기록되고,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하시는지 살펴볼텐데, 예수님이 위 12장 26절에서 힌트를 주십니다. 바로 마귀의 왕국 내에서는 분쟁이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무당이 귀신을 쫓아내지만, 쫓는 영과 쫓겨나가는 영 둘다 사탄의 부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이 영을 쫓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사탄의 왕국의 입장에서는 무당을 속이고 자신에게 묶어두려는 작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위 12장 27절에서 예수님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는데, 바리새인퇴마사들은 어떤 영을 힘입어 마귀를 쫓아냈을까요?
구약시대에도 거짓 대언자들은 계속 존재했는데, 성경에 '거짓'과 '대언자' 두 단어로 검색해보니 흥미로운 일화가 나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내어 그가 올라가 라못길르앗에서 쓰러지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런 식으로 하겠다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저런 식으로 하겠다고 말하였는데 (대하18:19)
그때에 한 영이 나아와 {주}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그를 꾀어내겠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무엇으로 하겠느냐? 하시니 (대하18:20)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그의 모든 대언자들의 입에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겠나이다, 하매 {주}께서 이르시되, 너는 그를 꾀어내겠고 또 이기리라. 나가서 그와 같이 하라, 하셨나이다. (대하18:21)
그러므로 이제 보소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대언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을 향해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하니라. (대하18:22)

악한 이스라엘 왕 아합이 대언자들을 모아놓고 전쟁에 나아갈지 고민하는 장면인데, 하나님께서는 아합이 전쟁에 나가 쓰러지길 원하십니다. 저기 거짓말에 능숙한 저 영이 누구일지도 흥미롭군요. 결국 하나님 뜻대로 아합은 전쟁에 나가 활을 맞고 죽고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짓 대언자의 행위가 이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그들의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탐욕에 빠지고 대언자로부터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다 거짓으로 행하기 때문이라. (렘6:13)
그들이 또한 내 백성의 딸의 상처를 조금 고쳐 주고는 평안이 없는데도 말하기를,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였도다. (렘6:14)

바리새인이 마귀를 쫓아낼때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행하였을 겁니다. 그 이적을 보는 백성들은 그들을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참여합니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를 때의 악함을 성령훼방죄의 바로 다음 구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무도 좋게 하고 그것의 열매도 좋게 하든지 나무도 썩게 하고 그것의 열매도 썩게 하든지 하라. 나무는 그것의 열매로 아느니라. (마12:33)

결국 악한 바리새인들은 이런 결말에 이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2)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마7:23)

이 죄의 위험성을 알 수 있는 장면이 사도행전 19장에도 있습니다.

그때에 떠돌아다니는 유대인들 중의 어떤 자들 곧 마귀를 내쫓는 자들이 악한 영들이 들린 자들을 향해 스스로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하며 이르되,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가 너희에게 엄히 명하노라, 하더라. (행19:13)
유대인으로 제사장들 중의 우두머리인 스게와라 하는 사람에게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그들도 그와 같이 하매 (행19:14)
그 악한 영이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19:15)
그 악한 영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그들을 눌러 이기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벌거벗고 상한 채 그 집에서 나와 도망하니라. (행19:16)

만일 이 악한 영이 덤비지 않고 두려운척 연기하며 도망을 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 죄는 정말로 성령의 사역을 훼방합니다.
바울과 같은 참 하나님의 사람이 마귀를 쫓아내어도, 그 이적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 나와 있듯이 사역 중 수많은 하나님의 권능있는 이적을 행하였지만, 계속해서 그 사도로서의 정체성이 공격받았습니다.

내가 자랑함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거니와 너희가 억지로 나를 시켰느니라. 내가 너희에게서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노니 내가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무슨 일에서나 가장 으뜸가는 사도들보다 결코 뒤지지 아니하노라. (고후12:11)
진실로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인내와 표적들과 이적들과 능한 행위들로 사도의 표적들을 행하였노라. (고후12:12)

이 죄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 죄 외 다른 죄들은 모두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과 관계없고, 오직 약속들을 붙들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고도 죄를 지어 양심이 찔리는 이 일은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가서 죽은 행위들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히6:1)

그러므로 증인들이 이렇게 큰 구름을 이루며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히12:1)

구원의 기초 원리에서부터 조금씩 성장해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경주입니다. 자신을 한번 돌아보세요. 믿기전과 지금, 믿은 직후와 지금,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조금씩 조금씩 성장합니다.
12장이 이 경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어 양심에 찔려 손을 늘어뜨리고 주저앉아 있습니까?

그러므로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12:12)
너희 발을 위해 곧은 행로들을 만들지니 이것은 저는 것이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고침을 받게 하려 함이라. (히12:13)

행로를 곧게 만들어 저는 다리라도 조금씩 나아가 고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계속 양심에 찔려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고 주저 앉아있으면 그걸 이런 양심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히10:22)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하게 하니 악한 양심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죄 때문에 부끄러워 나아오지 못하게 하는 양심은 그 안에 내가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 하는 악한 것이 숨어있습니다.

또한 자식들에게 하듯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권면을 너희가 잊었도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12:5)

어린 아이도 나쁜 습관을 고치려면 한번의 징계로는 안됩니다.
죄를 짓고 양심에 찔려 고통스럽습니까?
아버지의 채찍질입니다.
책망을 받으면 죄송합니다하고 또 아버지에게 나아가야합니다.
조금씩이라도 고쳐지는 것 경험해보셨지요?
혹시 반복해서 맞았는데도 안 고쳐집니까?
그럼 맞을때마다 멈춰설테니 경주에서 이기긴 힘들테고, 안타깝게도 상급이 깍일겁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는 아니하였노라. (히12:4)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딤후4:7)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딤후4:8)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죄와의 싸움은 안식과는 상관없습니다.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히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