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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영접 성령 침례

즉시 2022. 1. 27. 20:25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아니하여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시느니라. (행1:5)

믿음 여정은 회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님이 내안에 임하심으로 시작합니다.
그 성령님에 대해 예수님이 부활 후 승천하시기전에 위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찔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까? 하거늘 (행2:37)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8)

그런데,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임재 후 자신의 말을 듣고 찔려하는 사람들에게 위와 같이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우리 이방인도 먼저 침례를 받아 죄 사면을 얻고, 그후 성령님을 받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 우리 이방인이 최초로 성령 받은 장면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신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선포하는 것인데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주]시니라.) (행10:36)
내가 말하노니 그 말씀 곧 요한이 침례를 선포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말씀을 너희가 알거니와 (행10:37)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님께 [성령님]과 권능으로 기름을 부으시매 그분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하셨기 때문이라. (행10:38)
우리는 그분께서 유대인들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들이 그분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으나 (행10:39)
[하나님]께서 그분을 셋째 날에 일으키시고 그분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시되 (행10:40)
온 백성에게 보여 주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신 증인들 곧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신 뒤에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신 우리에게 보여 주셨느니라. (행10:41)
또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사 백성에게 선포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정하신 이가 바로 그분이심을 증언하게 하셨으니 (행10:42)
그분에 대하여 모든 대언자들도 증언하되,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들의 사면을 받으리라, 하느니라. (행10:43)
베드로가 아직 이 말들을 할 때에 [성령님]께서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 위에 임하시매 (행10:44)
할례자들에 속한 자들로서 믿은 자들 곧 베드로와 함께 온 자들이 이방인들 위에도 [성령님]을 선물로 부어 주시는 것으로 인해 다 놀라니 (행10:45)
이는 이방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며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것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이더라. 이에 베드로가 응답하되, (행10:46)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기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뿐, 이미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위에 나와있듯이 요한의 침례도 알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복음 선포중에 올바른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즉시 성령님이 임하였습니다. 회개, 영접, 성령임재 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위 사건을 보고 성령받을때 타언어, 즉 방언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오순절 예루살렘과 이방인 고넬료의 집 성령임재가 반드시 똑같은 모습으로 이뤄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았지만, 할례자들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처음에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조차도 사실 이 일이 일어날 줄 모르고, 고넬료의 집에 왔을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유대인인 사람이 다른 민족에 속한 사람과 교제하거나 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일인 줄은 너희가 아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사람을 속되다고 하거나 부정하다고 하지 말 것을 내게 보이셨느니라. (행10:28)
그러므로 내가 초청 받자마자 거절하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왔노라. 그러므로 내가 묻노니 너희가 무슨 의도로 사람을 보내어 나를 불렀느냐? 하매 (행10:29)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임재와 똑같은 일이 고넬료의 집에 일어난 것을 근거로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를 인정받습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되 마치 처음에 우리 위에 임하신 것 같이 하시더라. (행11:15)
그때에 내가 [주]의 말씀 곧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을 기억하였노라. (행11:16)
그런즉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었겠느냐? 하니라. (행11:17)
그들이 이것들을 듣고는 잠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11:18)

위 16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 성령임재를 보고 그때에, 이전 예수님이 승천 전 하신 말씀이 기억났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 베드로가 저 위 사도행전 2장38절에서 침례와 성령님 받는 것에 대해 미묘한 발언을 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성경에서 성령님 받는 장면을 찾기 위해 '성령'을 검색해보겠습니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여 그들이 [성령님]을 받게 하니 (행8:15)
(이는 아직 그분께서 그들 중의 아무에게도 내려오지 아니하셨고 그들이 다만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더라.) (행8:16)
그때에 그들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그들이 [성령님]을 받으니라. (행8:17)

위 구절들에서는 침례만으로는 성령님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아나니야가 자기 길로 가서 그 집에 들어가 그에게 안수하며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올 때 길에서 네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사 네가 시력을 받게 하시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셨느니라, 하매 (행9:17)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가 곧 시력을 받으니라. 그가 일어나 침례를 받고 (행9:18)
음식을 받으매 강건해지니라. 그 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 있던 제자들과 며칠을 지내며 (행9:19)
즉시 회당들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거늘 (행9:20)

[주]의 말씀을 그와 그의 집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말하니라. (행16:32)
그 밤 바로 그 시각에 그가 그들을 데려다가 채찍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자기의 온 가족이 즉시 침례를 받은 뒤에 (행16:33)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이르러 그들 앞에 음식을 차려 주며 자기의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믿고 기뻐하니라. (행16:34)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므로 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고 대언하니라. (행19:6)

19장을 제외하고는 성령님 받을때 타언어, 방언을 언급하는 구절은 없군요.
타언어, 방언은 성령님의 뜻대로 줄 사람에게만 주는 선물이라 성령님 받는 것과는 관계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대언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타언어들 통역함을 주셨으나 (고전12:10)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12:11)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는데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대언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선물들과 돕는 것들과 다스리는 것들과 여러 가지 타언어들이니라. (고전12:28)
모두 사도이겠느냐? 모두 대언자이겠느냐? 모두 교사이겠느냐? 모두 기적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고전12:29)
모두 병 고치는 선물들을 가지겠느냐? 모두 타언어들로 말하겠느냐? 모두 통역하겠느냐? (고전12:30)
오직 가장 좋은 선물들을 간절히 사모하라. 그럼에도 내가 너희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이노라. (고전12:31)

회개, 영접, 성령임재의 순서에서 성령임재는 결과입니다.
그럼 앞의 둘을 살펴봐야 할텐데, 영접은 사실 비교적 용이한 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하신 것, 부활을 통해 사망을 이기신 것 등 복음을 정확히 알아야하지만, 구원자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세상 종교에선 그게 쓸모없는 우상들이지만, 우리가 믿는 건 참 하나님, 창조주라는 것이 다릅니다.

제일 난관은 회개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데, 나는 그게 죄인지도 모르고 지내왔습니다.
그렇듯이 회개에서는 죄의 인식이 중요합니다.
구원받으려면 하나님 떠난 것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안에서 진리를 붙잡아 두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아니한 것과 불의를 대적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되었나니 (롬1:18)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19)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세상의 창조 이후로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 (롬1:20)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자기들의 상상 속에서 허망해지고 또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1:21)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선언하나 어리석은 자가 되어 (롬1:22)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것들과 같은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1:23)

이건 부모, 자식관계를 대입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부모인데, 자식인 사람이 부모를 모른채합니다. 부모에게 난 게 아니고 스스로 있다하며 자기를 높입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걸 최고로 섬깁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의를 쌓아 올립니다.
이 결과로 나와 같이 창조주 부모에게서 난 형제인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강탈하며 심지어 죽입니다.
하나님은 본래대로 자신을 부모처럼 사랑하고 공경하길 원하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실상은 하나님 떠난 상태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거짓말이나 도둑질같은 눈에 보이는 죄는 쉽게 인식되는데, 이 하나님 떠난 상태는 믿기전까지의 인생 전체를 통해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다소 희미하게 느껴지고, 내가 정말 회개를 했나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진정한 회개를 했나 점검하는데 실마리가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 (고후7:10)

처음에는 재앙, 질병, 세상의 고통, 지옥에 대한 두려움 등 세상의 근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하지만, 계속 "지옥가기 싫습니다. 하나님이 두렵습니다."에 머물러 있는 건 자기중심적이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이 아닙니다.
올바른 회개를 이루지 못해 사망에 이른 인물이 있습니다.

그때에 그분을 배반하여 넘긴 유다가 그분께서 정죄 받으신 것을 보고 뜻을 돌이켜 은 서른 개를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가져다주며 (마27:3)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하여 넘김으로 죄를 지었노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그것과 상관하라, 하거늘 (마27:4)
유다가 그 은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니라. (마27:5)

위 3절에 뜻을 돌이켰으나 목을 매는 결말에 이릅니다. 죄책감을 느꼈으나 저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그 안에 예수님 생각없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여전히 스스로 의를 이루려는 악한 것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는 올바른 회개를 합니다.

베드로가,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곧 그분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나가서 비통하게 우니라. (마26:75)

세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분께서 자기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요21:17)

끝까지 부인하지않겠다고 제일 먼저, 그것도 두번이나 큰소리쳤는데, 심지어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미리 경고까지 받았는데, 그대로 되어버렸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비통했을까요?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바다에 뛰어들고, 예수님의 세번 질문에 위와같이 답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주의 양들을 먹이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인생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내가 진정한 회개를 했는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누군가를 기쁘게하려면 그의 뜻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기 위해 오늘도 성경을 펼칩니다.